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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우 - 사후 신神이 된 충의의 표상. 유비 이름의 나쁜 기운 때문에 죽음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13-02-20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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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는 명함 

 
 
관우 60세 160년 ~ 219년 12월

 

너무 강한 자존감 때문에 오나라 손권과 대적함으로 죽었지만 죽어선 신神이 된 충의의 표상 관우.

무장으로서 유비만을 일관되게 섬기며 성실하고 위풍당당하게 살다가 죽어서는 신격화 된 관우는 이름에 그런 기운이 있다.
이름풀이에서 보면 일관, 천천, 위풍당당, 마디가 그런 기운들이다.
천천天天은 지존의 기운. 마디는 성실한 기운이다.
대우를 극진하게 해주던 조조로부터 빈털털이 유비에게 다시 돌아간 것은 이름에 있는 일관의 기운 때문이다.

오나라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봉화대를 설치한 것은 이름의 치밀한 기운 때문이다.
손권의 혼인 청에 대하여 범의 새끼를 어찌 개의 새끼에게 보내겠냐고 한 것과 잘난 타인을 인정하지 않았던 성격은 독야청청, 권위의 이름 기운 중에서 부정적 기운이 작용함 때문이다. 결국은 홀로 잘난 맛에 사는 독야청청과 권위의 부정적 기운쪽으로 선택함으로 오나라 여몽의 꾀병 후임으로 임명 된 육손을 깔보고 득의양양하게 형주의 주력군을 빼서 위나라의 번성 공략에 투입하는 결정적 실수를 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안 여몽에게 형주를 빼앗끼고 죽는다.

유비의 나이 41~60까지 이름의 기운을 보는 인생3구간 이름의 기운에 박락과 괴리가 있다.
박락은 [박락 剝落 剝 벗길 박 , 깍아 내릴 박 落 떨어질 락(낙)], 괴리는 [괴리 乖離 괴리가 있음, 문제가 있음, 큰 사고]를 뜻하는 이름의 기운이다. 이 기운은 유비 자신이 당하거나 지인이 당하는 기운이기도 하다. 말을 바꿔타고 방통이 유비를 대신해서 죽은 것과 관우가 죽은 것은 방통과 관우의 이름기운에는 없지만 유비에게 있는 이름의 기운 박락과 괴리 때문에 방통과 관우가 죽었다.

관우의 전체적인 이름의 기운으로 볼 때 독야청청, 권위의 부정적 기운만 잘 다스렸다면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만한 대단한 이름의 기운을 갖고 있었다.

관우(關羽)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무장이다.

본래 장생(長生)이라는 자를 썼으나, 나중에 운장(雲長)으로 바꿨다.

장비(張飛)와 더불어 유비(劉備)를 오랫동안 섬기며 촉한 건국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그의 충성심과 의리, 당당한 성품으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장수로 손꼽힌다. 의리(義理)의 화신(化身)으로 민담이나 민간전승에서 널리 이야기되었고, 나중에는 신격화(神格化)되어 관제묘(關帝墓)가 세워졌다.

오늘날에도 관우는 중국인들이 숭배(崇拜)하는 대상 가운데 하나이다.

관우(關羽)가 신(神)으로 추대(推戴)된 이후, 중국 후대 왕조의 황제(皇帝)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관우와 겹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피휘(避諱)를 하였다.

정사 삼국지(正史 三國志)에는 관우의 탄생과 관련된 기록이 보이지 않지만, ≪전장군관장목후조묘비명(前將軍關壯穆侯祖墓碑銘)≫과 ≪사전비기(祀田碑記)≫·≪관공연보(關公年譜)≫·≪관제지(關帝志)≫ 등의 기록들과 민간(民間)에 전하는 여러 가지 설들을 종합하자면, 그는 대체로 환제(桓帝) 연희(延熹) 3년(160년 6월 24일)에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관우(관공)의 가정 구성원에 대한 기록은 정사 삼국지에는 거의 기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중국 지방지, 민간전설에 근거해서 그 내용을 살펴보자면, 관우의 조부(할아버지)는 관심(關審)이며 자는 문지(問之), 호는 반석(磐石)이다. 90년(후한 화제 영원 2년 경인년) 생으로 해주 상평촌 보지리(解州 常平村 寶池里)에 거주했으며 항상『역(易)』,『춘추(春秋)』등의 책을 자식에게 가르쳤다. 157년(후한 환제 영수 2년 정유년)에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관우의 부친은 관의(關毅) 자는 도원(道遠)이며 아버지 관심이 세상을 떠나자 부친의 묘소에서 3년상을 치렀다. 관의의 3년상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60년(후한 환제 연희 3년 경자년) 6월 24일에 드디어 그의 아들 관우가 태어났다. 관우는 성장하여 호씨(胡氏)와 혼인하였고 178년(영제 광화 원년 무오년) 5월 13일에 그의 첫 아들 관평(關平)을 얻었다.

관평은 소설 삼국지연의에서와는 달리 본래 관우의 친아들이자 그의 장남이다.

관우는 탁군으로 이주하고 있을 때, 유비가 도당을 모집하는 것을 보고 장비(張飛)와 함께 찾아가, 그의 호위를 맡았다. 유비는 언제나 관우와 장비와 함께 한 방에서 같이 지냈으며, 그 정이 형제와도 같았다. 그러나 공적인 장소에서 관우는 하루 종일 유비 곁에서 호위를 맡고, 유비를 따라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키는 9척(한나라때 1척 = 약 23cm, 9척 = 207cm), 수염 길이가 2자(= 약 60cm)이며, 얼굴이 홍시처럼 붉고, 기름을 바른 듯한 입술, 붉은 봉황의 눈, 누에가 누운 듯한 눈썹 등의 풍모로 묘사된다. 여기에 대장간에서 특수 제작한 무게 82근(한나라 때 1근 = 223g, 82근 = 18kg 286g)이 나가는 청룡언월도가 추가되어, 오늘날의 관우상이 완성된다. 다만 청룡언월도는 한나라 때의 무기는 아니고(한나라 때에는 언월도가 아예 없었으며, 또한 (언)월도는 북방 민족의 무기이다), 삼국지연의에서 나관중이 관우의 무기로서 꾸며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실제로 관우 자전에서는 그에 대한 기록이 너무나 간결하다. 유비가 공손찬(公孫瓚) 밑에서 평원의 상(相)이 되었을 때, 장비와 함께 별부사마로 임명되어 부대를 지휘하도록 했다는 기록 뿐, 그 후 이야기는 200년까지 건너뛰고 만다. 유비가 서주를 차지하고 있을 때는, 하비 태수의 직무를 대행하기도 하였다.

백마 전투200년 유비가 조조에게 반기를 들어, 서주자사 차주(車胄)를 죽이자 관우는 하비성을 수비했다. 그러나 유비는 조조에게 패해 하북의 원소(袁紹) 밑으로 도주하고, 관우는 조조에게 사로잡혀 항복했다. 조조는 관우를 후하게 대접하고 편장군에 임명하지만, 관우는 조조 밑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조조가 장료(張遼)를 파견해 그의 의중을 떠보았을 때도, 관우는 “조조의 뜻은 알겠지만 나는 유비에게서 많은 은혜를 입어 함께 죽기로 맹세한 사이로 절대 배반할 수 없다. 나는 결코 이곳에 머무르지 않을 터이지만 반드시 수훈을 세워 조조에게 은혜를 갚고 나서 떠날 생각이다” 라고 대답한다.

원소는 “안량(顔良)은 편협해서 폭넓은 지휘권과 재량권을 줘서는 안된다.” 라는 저수(沮授)의 만류를 무시하고, 안량에게 곽도(郭圖)와 순우경(淳于瓊)를 딸려, 조조 휘하의 동군 태수 유연(劉延)이 지키는 백마진을 공격하도록 했다.

이에 대해 조조는 장료와 관우에게 공격을 명했다. 관우가 멀리서 안량의 군기와 덮개를 보고는 말을 채찍질해 나아가 수만의 군졸속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머릴 베어 돌아오니, 원소의 여러 장수들 중에서 능히 당해낼 자가 없었다(삼국지 촉서 관우전).

삼국지에 따르면 조조는 천자의 이름으로 관우에게 편장군이라는 관직을 내렸고, 이는 관우가 천자(황제)에서 받은 첫 관직이었다. 그러나 관우의 마음에는 언제나 유비가 있었다. 원소가 진군하여 양무(陽武)를 지키자, 관우는 원소군에 있는 유비를 찾아 떠났다(삼국지 위서 무제기). 떠날 때 하사품에 봉인을 하고 편지를 보내 이별을 고한 다음 조조의 곁을 떠나 유비에게로 향했고, 조조의 측근이 추적하려고 했지만, 조조는 “사람에게는 각기 주인이 있으니 뒤쫒지 말거라” 라고 타이르며 그(관우)를 조용히 보내주었다(삼국지 촉서 관우전).

관우가 조조를 떠나면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조조 공께서 저를 후하게 대해 주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유비 장군에게 깊은 은혜를 받았기에 그를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삼국지 촉서 관우전)

이때 관우는 여포가 소지하고 있던 적토마를 조조에게서 물려받았다. 하지만 말(馬)의 평균수명을 감안한다면 이것 역시 허구이다. 만약 관우가 적토마를 타고 다녔다면 여포가 타고 다닌 적토마의 2세 내지는 3세에 해당되며 그 적토의 본마(本馬)는 아닌 것이다.

삼국지연의에는 조조가 여포로부터 몰수한 적토마를 관우에게 주었으며, 관우가 패하여 생포당하자 적토마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다가 관우와 같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사료에는 적토마의 행방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며, 실제로 조조가 관우에게 주었다고 해도 말의 수명을 고려했을 때 오래 살았다고 보기 힘들다.

원소와의 전투에서는 안량을 토벌하고 유비의 편지를 받자, 조조 밑을 떠나 유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관우는 유비와 다시 만나 형주의 유표(劉表)에게 몸을 의지한다. 유표가 죽은 후 조조가 형주 평정에 착수하자, 관우는 수백 척의 군선을 모아 하구로 향해 오나라의 손권(孫權)과 연합해 조조의 대군을 격파한다. 정사에서는 제갈량과 마찬가지로 촉한의 인물들이 적벽대전에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적벽대전에서 용맹을 떨친 장수 역시 황개(黃蓋)와 한당(韓當)이며 관우와 장비 등은 아니다.

조조가 적벽에서 패주할 당시 조조가 잃은 병선은 모두 형주의 병선이었으며, 조조가 잃은 병사도 항복한 유종의 수 만 병력이었다. 즉, 지나치게 거대해진 조조의 세력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려면 패주하는 조조의 육군을 포착해 섬멸해야 했으나, 퇴각로로 사용된 화용도를 적벽대전이 발발하기 바로 직전에 조비가 길을 닦아놓았기 때문에, 조조의 청주병은 거의 피해를 받지 않고 양양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적벽대전 종결 이후 주유는 강릉으로 쳐들어가 강릉을 함락시키게 되고, 강릉을 수비하던 조인은 양양으로 퇴각하고 만다. 세상의 원칙상으로는 2만의 병력을 동원한 손권보다 3만의 병력을 동원했던 유비쪽에 형주의 소유권이 넘어가야 했지만, 주유가 강릉을 차고 들어앉아 그의 머릿속에 구상하고 있던 '양주, 형주, 교주, 익주, 서량을 병합한 천하이분지계'를 실행시키려 한다. 즉, 애초에 주유는 머릿속에 유비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었다. 적벽대전 후의 상황에 대해 유비와 손권사이의 확실한 논의가 없었던 탓이다. 주유의 이러한 행동에 의해 갈등이 생기게 되었으며, 상심한 유비는 마량의 헌책을 받아들여, 대신 형주 남부의 4군을 점령하여 수중에 넣게 된다. 때마침 병이 깊어진 주유가 병사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반유비파의 수장이었던 주유가 죽을 때, 후일을 맡긴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친유비파의 거두인 노숙이었다. 이는 주유가 자신의 살아생전에는 반유비정책이 이롭다고 판단하였고, 병이 깊어져서 사망한 후에는 자신만큼 전술을 운용하는 인물이 없다는 판단 하에, 내실을 확고히 다지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친유비파의 노숙을 후임자로 택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노숙은 주유의 후임으로 선택되어 형주병을 그대로 넘겨받았으며, 오나라의 부족한 인구로는 형주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 손권에게 형주를 유비에게 맡기고 장강 이남의 내실을 다지는 쪽으로 정책을 변경한다.

적벽 대전 이후적벽 대전에서의 승리 후 유비가 강남의 여러 군을 지배하자, 관우는 양양태수와 탕구장군에 임명되어 양자강 북쪽에 주둔, 마침내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러 나서자 관우는 제갈량과 함께 형주의 수비를 맡았다. 그러나 도중에 유비의 군사 방통(龐統)이 전사하고, 익주에서 유비가 궁지에 빠지자 제갈량도 익주로 구원하러 나가 관우 혼자 형주에 남게 된다. 익주 평정 후 관우는 형주 군사총독에 임명되고, 3만의 군사로만 형주를 지키겠다고 하였다.

215년 손권은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것을 이유로 형주 반환을 요구하며, 남쪽 3개 군(장사, 영릉, 계양)에 관리를 파견하는데, 관우가 이들을 쫓아냈다. 그래서 손권은 여몽(呂蒙)에게 명령해 3군을 공략하고, 익양에서 관우와 대치한다. 관우와 노숙(魯肅)에 의한 담판이 이루어지고, 결국 유비는 조조의 공격에 대비해 3군을 반환했다.

서량의 마초(馬超)가 유비에게 항복했을 때는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재능을 물어보았다. 제갈량은 관우의 성품을 잘 알고 답신하길 “마초는 문무를 겸비한 당대의 걸물이나 미염공(美髥公)인 당신께는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관우는 이 편지를 받고 기뻐하며 빈객들에게 보여줬다.

또 관우의 초인다운 모습을 보여 주는 일화가, 삼국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관우는 왼쪽 팔꿈치에 화살을 맞은 적이 있어, 상처가 치료된 후에도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면 욱신욱신 뼈가 쑤셨다. 의원에게 진찰을 받아보니, “화살촉에 묻어 있던 독이 스며들고 있으므로 뼈를 깎아 독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판명되어 절개 수술을 행한다. 관우는 수술 중에도 연회를 즐기고 피가 가득 쏟아져 나와도, 태연하게 담소했다고 한다.

219년 유비가 한중왕에 올랐을 때 관우는 전장군에 임명되었다. 관우는 번성을 공격하여 우금(于禁)을 생포하고 방덕을 참수했다. 조조는 관우의 기세를 두려워하여 허도를 떠나서 낙양(落陽)으로 천도할 것을 고려하기도 하였지만, 사마의(司馬懿)와 장제(蔣濟) 등이 손권의 군사를 이용하자는 건의를 듣고 실행하지 않았다. 한편 손권은 아들을 관우의 딸과 혼인시키려 해서 사신으로 제갈량의 친형인 제갈근(諸葛瑾)을 관우에게 보냈지만, 관우는 허락하지 않았고 사신으로 온 제갈근에게 범의 딸을 어찌 개의 아들에게 시집보내겠느냐는 욕설과 협박을 하는 등의 무례함을 범하였다.

관우의 번성 포위 작전 때 손권의 지원군의 도착이 늦자, 손권을 오소리에 비유하며 모욕하였기에 손권은 관우를 탐탁찮게 여기고 있었다. 관우의 무례함이 극에 달하는 행동으로 인해 분개하던 손권은 조조와의 요청을 수락하고, 관우에게 기습을 감행하여 강릉을 점령하였다. 이 때 관우는 번성을 지키고 있던 조인의 군대를 상대로 승승장구하고 있으나 조인을 지원하기 위해 온 서황과 겨뤄 패하고 도망쳤다. 손권은 서황에게 패해 도망치던 관우를 공격하였고, 결국 여몽(呂蒙)의 계략으로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關平)을 사로잡아서 건업으로 끌고 온 뒤 참수했다. 관우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이릉 전투를 야기시켰으며, 유비와 장비의 죽음에 직,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유비는 관우를 장무후(張繆候)로 봉하고, 그 아들인 관흥(關興)이 관우의 작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이 이후 촉한의 황제 유선(劉禪)이 등애(鄧艾)에게 항복하자마자, 관이(關彛) 등 관흥의 후손들은 이때 방덕의 아들로서 종회(鍾會)의 부장으로 참전한 방회(龐會)에게 전원 잡혀가서 한 명도 남김없이 멸문되었다. 이 때문에 관우의 후손은 아무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 관우의 67대손인 관중진(關忠金, 관충금)을 찾아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관중진은 한국 전쟁에서 인민군의 편이 되어 참전했다. 사실 관평의 후손들이 관우와 관평이 포로로 잡힌 후 참수된 이후에도 형주지역에서 계속 살아있었고 그들의 후손이 관중진이였던 것이다.

나관중 저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 관우, 장비 3인이 도원결의로서 의형제를 맺었다고 묘사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는 태사자가 유비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자 유비와 같이 태사자의 요청에 따라 공융을 구출하러 가서 관해와 90여합의 일기토 끝에 관해를 사살하고 공융을 구출한다고 묘사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유비가 직접 출동한 것은 아니고 유비가 태사자에게 정병 3천명을 빌려줘서 보내자 이 소식을 들은 관해가 포위를 풀고 도망친 것이다.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관우는 공손찬 휘하의 병졸로 참전해 조조(曹操)의 허락을 받아 화웅(華雄)을 죽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과 다르고, 실제로 화웅은 전력을 추스리고 양인으로 출진한 손견(孫堅)에게 죽임을 당했다.

또한 관도 대전에서 관우는 안량과 함께 원소군의 맹장으로 유명한 문추(文醜)도 죽였다고 하나, 실제로 관우는 안량만 주살했을 뿐 문추의 경우 치중대를 미끼로 한 순유(荀攸)의 책략에 빠진 문추를 서황(徐晃) 등이 습격하여 없앤 것으로 나와있다. 이 공로로 조조는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로 봉하고 많은 상을 내렸지만, 결국 관우는 유비에게로 돌아갔다고 쓰여 있다.

관우가 조조에게 항복할 때 ‘조조가 아니라 한나라 황실의 천자에게 항복한다’, ‘유비의 부인 등을 보호한다’, ‘유비가 있는 곳을 아는 대로 다시 떠난다’는 3가지 조건을 내놓는다. 이 항복을 권유하는 사람으로 나선 자가 장료인데, 여포(呂布)를 처형할 때 그 부하였던 그를 구해준 것도 관우였다. 그는 삼국지에서도 관우와 행동을 함께 하고 있으며, 삼국지연의에서는 적대 관계에 있으면서도 깊은 유대가 있는 듯이 묘사되고 있다.

관우는 조조의 밑에서 유비에게로 떠나는 도중 도중에 5개의 관문을 돌파하고 6명의 장수를 참살한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의 설화가 전해지며, 이것은 나중에 적벽에서 패주한 조조를 놔주는 이유가 된다. 관우가 조조를 떠나 유비를 찾아간 것은 사실이나, 오관참육장의 설화는 허구이다.

삼국지연의에서 관우는 적벽 대전에서 대패한 후 화용도로 도망가는 조조를 정에 얽매여 그냥 놓아주고 만다. 제갈량(諸葛亮)은 이를 미리 예측하고 있었지만 “조조의 운명이 아직 다하지 않으므로 관우에게 의리를 갚게 해도 좋다”라고 말하여 관우를 출진하도록 한다. 그리고 관우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 채 귀환하자 규율상 제갈량은 “서약에 따라 목을 치겠다.”라고 명령하는데, 유비가 이를 가로막았다. 이후 자존심이 센 관우는 제갈량에게 머리를 들지 못하게 된다고 하나, 정사엔 화용도에 관한 내용이 없다.

연의에서의 제갈량이 취한 강릉과 양양을 공격할 때 사용한 '공성의 계'는 허구로써, 주유가 차지한 강릉을 유비가 임대받은 것과 같다.

관우는 방덕과의 대결에서 팔을 크게 다쳐 부상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뼈를 긁어내며 치료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고기를 먹으며 바둑을 두었는데 삼국지연의에서는 이것을 각색한 내용이 나온다. 관우가 방덕(龐德)과의 싸움에서 이 상처를 입었는데, 명의 화타(華陀)가 그의 상처를 살핀다. 그리고 수술 중에는 마량(馬良)과 바둑을 계속 두면서 먹고 마셔 화타를 감탄하게 만든다. 관우가 실제로 이런 치료를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견딘 것은 사실이지만 연의에서는 그 의원을 화타로 묘사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화타가 아닌 다른 의원이 치료를 해준 것이다.

관우 사망 후 손권의 축하를 받던 여몽에게 관우의 혼이 씌어 여몽이 몸의 일곱 구멍으로 피를 흘리며 죽었다고 하나, 여몽은 본래 병으로 사망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몽은 자신이 전반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자신의 임무 중에 일부를 육손과 공동으로 수행했다. 또한 손권이 이를 보고 관우를 벤 것에 대한 후환을 두려워하여 머리를 조조에게 보내었다. 연의에서 조조는 관우의 머리를 보며 인사를 하다, 갑작스레 눈을 뜬 관우를 보고 크게 놀란다. 이에 조조는 나무를 깎아 관우의 머리를 정성스레 붙여주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관우를 평하길, “관우는 만 명을 대적할 만한 용맹한 장수이며 조조에게 보답을 하는 등 국사(國士)의 풍격이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관우는 냉정함이 부족하다는 단점으로 결국에는 실패하였다”라고 했다. 또 삼국지연의의 저자들은 관우는 거만하여서 유비가 오호대장군의 으뜸으로 세울 때 황충(黃忠)을 "황충같이 늙어빠진 장수가 어찌 저와 같은 자리에 설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며 비난하였는데, 여몽은 이러한 관우의 단점을 이용하여 관우를 벨 수 있었다.

그러나 황충과 동렬에 있는 것에 대한 불쾌함을 드러낸 부분을 보면 관우는 유비 세력에서 경력과 공헌에서 부동의 2인자였다. 그와 같은 동렬인 다른 장수들인 장비는 초창기부터 함께 했고, 그의 능력이나 활약을 직접 옆에서 봤다. 마초는 한때 유비, 조조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군웅 출신이라는 이름값만 보더라도 대단한 인물이고, 조운 역시 성실히 유비를 따르며 활약한 장수라 관우는 그들이 자신과 같은 대열 직위에 있어도 불만이 없지만 황충은 조금 이야기가 달랐다. 우선 황충은 유비가 형주에서 기반을 잡게 되고 난 후 얻은 인물이라 장비와 조운과 비교했을 때 둘이 같이 활약했던 경우가 매우 적다. 관우로서는 황충이 자신과 같은 대열에 있을만한 공훈과 능력이 있는지 알 기회가 없던 것이다. 황충이 하후연을 참살하는 활약을 펼쳤다지만 당시 형주를 지키던 관우로서는 그 모습을 볼 기회가 없었으니 관우 입장에서는 딱히 뭔가 공을 세운 거 같지 않은 늦깎이 신입생이 어느 순간 자신과 같은 대열 직위에 있게 된 것이 탐탁치 않아도 이상할 점이 없다.

오나라와의 갈등에서도 원인을 보면 손권 쪽이 억울한 피해자라고 볼 수 없다. 우선 손권은 겉으로는 동맹이라고 하면서도 유비가 가지고 있는 형주 땅의 소유권에 대해 늘 간섭하였다. 손권이 혼사를 제의했을 때도 손권 자신이 관우와 사돈이 되어 유비와 관우의 신뢰에 금이 가게 하려는 의도와 관우의 딸을 인질로 삼으려는 의도가 너무나도 분명했기에 관우 입장에서는 결코 손권과 오나라를 좋게 볼 수 없었다.

관우가 오만한 부분이 있고, 외교에서도 유연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지만 일생을 장수로서 살아온 관우가 제갈량만큼의 정치적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숭배의 대상이 된 관우 이 부분의 본문은 관성제군입니다.
 
도교에서는 관우를 신격화하여 전쟁의 신인 관성제군(關聖帝君)이라 부른다. 공자의 사당을 문묘(文廟)라고 하듯이, 관우의 사당을 무묘(武廟)라 하여 관우는 무의 화신으로 추앙받는다. 관제묘가 사당 형식으로 처음 세워진 것은 명나라 말기인 1594년 으로, 명나라가 자신들의 임진왜란 출정 때 이긴것을 관장군의 덕이라고 여겨서 세워져 중국 대륙 각지, 나아가 대만, 홍콩, 한국, 일본 등지에도 관제묘가 세워졌다. 우리나라에는 관왕묘나 혹은 관제묘라고 하며 주로 충청도, 경상도 지방에 몇몇 있다. 서울시 종로구에 숭인동에 위치한 "동묘"가 바로 이 관왕묘 중 하나이다. 이 관왕묘에는 관우를 죽인 여몽의 성과 같은 여(呂)씨와 육손의 성과 같은 육(陸)씨가 들어오면 아무 이유없이 죽는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하지만 관우의 유해가 어디에 묻혔는지는 현재까지 아무도 모르며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다. 즉 관우의 묘는 묘(墓)가 아니고 관우의 위패를 모신 묘(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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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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