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장 63세 157년 ~ 219년
이름 기운 씹음 때문에 유비에게 항복한다.
씹음이란 [아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 처럼 과거의 선택을 잘 못해서 현재나 미래에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는 이름의 기운으로 유비와의 관계에 유장은 씹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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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장(劉璋, ? ~ 219년)은 중국 후한 말기의 군웅으로 자는 계옥(季玉)이다. 유언(劉焉)의 4남이다. 위의 출생년도는 유장의 아버지 유언의 나이를 바탕으로 추정한 것이다.
생애 초창기
봉거도위(奉車都尉)로 장안에서 벼슬하고 있었으며, 형주자사 유표가 유언의 야심을 경계하는 표문을 올리자 헌제는 유장을 보내 유언을 효유하게 했다. 그러나 유언은 도리어 유장을 잡아두고 돌려보내지 않았으며, 장안에 있던 아들들과 마등의 음모에 공조하여 장안을 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익주목, 잇따르는 반란
흥평 원년(194년), 유언이 죽자 주의 관리 조위(趙韙) 등에게 익주자사로 추대를 받았으며, 조정에서 감군사자로 익주목을 겸하게 하는 한편 조위는 정동중랑장으로 삼았다. 당시 장안에서는 유장이 익주자사를 대신하자, 호모(扈瑁)로 익주자사를 삼아 한중으로 들여보냈고, 또 형주별가 유합(劉閤), 유장의 장수 심미(沈彌), 누발(婁發), 감녕(甘寧)이 모반하여 유장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형주로 달아났고, 유장은 조위로 하여금 형주의 유표를 치게 해 구인에 주둔했다.
한중(漢中)의 장로(張魯)가 복종하지 않자 그의 어머니와 동생을 죽였고, 서로 싸웠다. 유언 대부터의 신하인 방희(龐羲)를 파서태수로 임명하여 장로를 쳤으나 이기지 못했으며, 마침내 방희는 권세를 오로지했다. 유장은 방희에 대한 참언을 곧이들어, 방희와의 사이에도 틈이 생겼다. 유장은 판단력이 부족하고 남들을 잘 믿었기 때문에 내부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당시 남양과 삼보 일대에서 익주로 흘러들어온 유민들을 모아 동주병이란 군대를 만들었는데, 유장은 이들을 통제하지 못해 동주병이 익주 토박이들을 침탈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또 유장의 정령에 이지러진 것이 많아 익주 사람들의 원한이 커지자, 유장은 조위가 익주에서 민심을 얻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이 문제를 맡겼다. 그러나 조위는 유장 통치의 문제를 말미암아 반란을 일으켜, 형주와 통하고 또 익주의 대성들과 은밀히 결탁하여 모반을 일으키니 촉군, 광한군, 건위군이 모두 조위에게 호응했다. 유장은 성도로 들어갔고, 동주병은 조위를 두려워하여 분전하여 반란군을 무찔렀고, 강주까지 진격했으며, 조위의 수하가 모반하여 조위를 죽여 반란은 끝났다. 당시 조정에서는 익주의 난리를 듣고, 익주목을 우단(牛亶)으로 교체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유비와의 전쟁
조조(曹操)가 형주를 치려 하자 사자를 보내 진위장군에 임명되었으며, 또 별가종사 장숙을 파견하여 수족(익주에 원래 살던 비한족) 병사를 바쳤다. 그리고 다시 별가 장송을 파견하였는데, 당시 조조가 적벽에서 지자 장송의 권유로 유비(劉備)와 화친하고 그를 익주로 끌어들여 안팎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당시 황권, 왕루 등은 이를 반대했으나 유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유비는 건안 16년(211년)에 익주로 들어왔고, 유장은 유비에게 군자를 제공하여 한중의 장로를 치게 했다.
건안 17년(212년), 유비는 조조가 손권을 치려 하자 이를 구실로 유장에게 동쪽으로 가겠다며 1만 명의 군자를 요구했으나, 유장은 4천 명의 군자만을 주었다. 마침 장송이 유비와 법정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것이 형 장숙에게 들통났고, 이로써 장송과 유비가 내통한다는 것이 드러나 유장은 장송을 베고 유비를 적대하여 관문마다 유비를 지나가게 하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이로써 유비와 유장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유장은 유괴, 냉포, 장임, 등현 등을 보내 부에서 유비를 막게 했으나 져 면죽으로 물러나 지켰고, 유장은 다시 이엄을 파견하여 면죽의 군대를 지휘하게 했으나 이엄과 비관이 투항하여 면죽을 내주었다. 유비가 유괴, 장임, 유순이 지키는 낙을 1년간 포위하면서 익주의 각 군현을 공략해, 황권이 지키는 광한현을 제외한 모든 군현이 유비에게 투항했다.
건안 19년(214년)에는 낙이 함락되었고, 치소 성도를 포위당했다. 성도에는 아직 정예병 3만이 있고 군량도 충분하여 관리들과 백성들은 결사항전을 원했으나, 유장은 이들이 받을 고통을 걱정하여 유비에게 항복했다.
말년
유비에게 항복한 후, 공안(公安)으로 옮겼으나, 건안 24년(219년) 손권(孫權)이 형주를 탈취했을 때 손권에 의해 익주목으로 임명되었고 얼마 못 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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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1
이름은 인생의 비밀지도/좌우명
이름으로 인생을 경영할 수 있다
이름풀어 보면 인생살이 다 나오니 처세법도 알 수 있다
누구나 이름처럼 산다. 이것을 알고 삶이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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