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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는 명함
제갈량 54세 181년 ~ 234년 가을 8월
탁월한 능력을 갖고도 천하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은 이름의 기운 씹음 때문이다.
유비, 관우와 함께 제갈량은 삼국지 소설이 쓰여지던 당시의 촉한정통론이라는 중국의 정치적 유익 때문에 삼국지의 스타로 부상한 인물이다. 중국의 정치적 유익이란 관점으로 쓰여진 나관중의 삼국지 소설 속 내용과 실제적 사실은 많이 다른 삶을 산 인물이다.
촉한정통론은 당시 한족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당시 한족의 송나라는 북방민족이 세운 금나라, 요나라에 시달리다가 몽골족의 침입으로 나라가 존폐의 위기에 처합니다. 한족 최대의 시련기에 국력을 모으기 위해 가장 중국적인 것을 정치적으로 내 세울 필요가 있게 됩니다. 그렇게 촉한정통론이 세워지면서 위나라의 신하였던 사마의 자손이 삼국시대를 통일하며 세운 진나라의 내부 분열 때문에 북방민족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한 그들은 위나라 조조를 악역으로 하고 삼국시대에서 가장 힘이 약했던 유비의 촉나라를 띄움으로써 한족의 일체성을 회복하게 됩니다. 이것이 촉한정통론입니다. 촉한정통론에 의해서 쓰여진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는 유비를 인자로운 인물로 띄우기 위해서 황건적 난을 진압 한 후 안희현 현위로 부임한 유비에게 시찰 나온 독우가 뇌물을 요구하며 부당한 처사를 계속하자 열받은 장비가 독우를 매질하는데 사실은 장비가 팬 것이 아니라 유비가 때린 것이다. 관우가 전국적 용장으로 등극하게 되는 동탁의 장수 화웅의 목을 술잔이 식기도 전에 베어 오는 장면은 사실 관우가 아니라 손견이 화웅을 벤 것이고 관우가 유비에게 가기위해 조조를 떠나며 다섯 관문의 장수를 베는 장면도 역사적 사실엔 없다. 나관중이 지어낸 소설이다. 이런 다른 사람이 한 일을 촉한정통론에 의해서 유비, 관우, 제갈량이 아주 멋지게 한 것으로 소설화 된 예는 많다. 차차 설명한다.
소설에서 적벽대전 전에 주유의 제안으로 제갈공명이 조조로부터 화살 10만촉을 배에 꽂아 오는 장면 등은 소설 속 허구이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쓰여진 진수의 정사正史 삼국지의 내용을 보면 군사적 능력보다는 정치적 능력이 더 있었다고 기록되었지만 승자인 위나라의 관점으로 쓰여진 진수의 정사正史 삼국지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제갈량의 위나라 북벌은 위나라의 국력에서 본다면 가소로운 것으로 보여졌을 것 같다. 위 : 오 : 촉 국력을 본다면 65 : 20 : 15 수준이다. 제갈량은 원만한 처신으로 승상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
유비 사후에 제갈량은 지속적인 북벌을 추진했으나 이름의 기운 씹음, 속빈강정 처럼 위나라 조조를 친 북벌의 결론은 없었다.
씹음이란 [아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 처럼 과거의 선택을 잘 못해서 현재나 미래에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는 이름의 기운이다.
제갈량의 인생에서 가장 잘못된 씹음의 선택과 결정 실행은 주군으로 유비를 선택한 것인데 이는 쌍방의 운명임을 어찌하랴. 유비 때문에 맘 고생 엄청했을 것이다.
유비는 서주, 형주를 그냥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함으로 50이 되기까지 근거지 없이 여기저기 유랑했다. 제갈량을 비롯한 많은 측근들이 유비의 그런 처신 때문에 씹혔다.
그 다음 중요한 씹음 예 두가지를 든다면
첫째는 223년 북벌 때 위연이 제갈량과 다른 산악길로 질러서 동관에서 제갈량과 만나 한신의 선례를 따르자며 병사 1만명을 요청한 것을 거절한 것이다. 위연의 생각되로였다면 북벌의 순행이 가능했지만 보수적 안정적인 제갈량으로서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북벌은 실패한다.
두 번째 씹음 예는 228년 북벌 때 한중에 주둔하며 전격적 공략으로 기산을 공격해 3군을 장악했죠. 그러나 마속은 말이 앞서니 중히 쓰지말라는 유비의 유언이 있었음에도 제갈량은 마속을 가정전투의 선봉으로 세웠죠. 그러나, 마속은 제갈량의 작전대로 진을 치지 않음으로 전투에서 패합니다. 마속의 패배는 북벌 자체를 와해시킨 중요한 사건으로 제갈공명은 친자식처럼 여기며 후계자로까지 생각하던 마속을 참수합니다. 이것이 읍참마속입니다.
소설 속에서는 마치 제갈량의 북벌이 대단한 것으로 전개되지만 실상을 보면 조조 위나라의 서북쪽 끝자락 일부분에서 전개된 전투에 불과하다. 위 : 오 : 촉 국력을 본다면 65 : 20 : 15 수준이다. 어찌보면 15% 국력 수준의 촉으로서는 공격이 최선의 수비였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제갈량의 북벌로 설령 그곳이 정벌되었더라도 위나라의 수도까지 공략하기에는 너무도 떨어진 변방에서의 전투였을 뿐이다. 이해를 돕기위해 제갈량의 위나라 북벌을 중국을 치기위해 서울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예를 든다면 신의주 압록강을 넘어서 요동반도 부근에서 전투가 벌어진 정도이다. 중국의 수도까지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지역에서의 전투란말이다. 제갈량은 끝내 이름의 기운중에 한자+자 3구간에 있는 박락의 기운을 극복하지 못하고 전쟁터에서 죽는다.
[박락剝落] 剝 벗길 박, 깍아 내릴 박 落 떨어질 락
유비의 절대적지지를 받으며 형주를 얻고 서촉까지 영역을 넓힌 것은 인생2구간과 3구간의 긍정적 기운인 희망, 원만, 군림, 융성, 완성, 위풍당당, 장식 등의 기운 때문이다.
제갈량(諸葛亮, 181년 7월 23일 ~ 234년 8월 28일)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모신(謨臣)이다. 자는 공명(孔明)이며, 별호는 와룡(臥龍)·복룡(伏龍). 전란의 시대, 형주의 초야에서 지내던 중 제갈량의 나이 27세 때 유비(劉備)의 삼고초려로 세상에 나온 제갈량은 재략과 웅재로써 유비를 도와 촉한(蜀漢)을 건국하는 제업을 이루었다. 적벽에서 손권(孫權)과의 연합을 이끌어내 당대 최강의 제후인 조조(曹操)의 남하를 저지하였고 형양을 차지한 후 익천를 도모해 유비를 제위에 오르게 하였고 제갈량은 승상의 직에 오른다. 유비의 사후 출사표(出師表)를 후주 유선(劉禪)에게 올린 후 중원(中原)을 도모하였으나 적수 사마의(司馬懿)와의 대결 도중 오장원(五丈原)에서 나이 54세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출사표는 후세 사람들이 이 글을 보고 울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고 평하는 명문으로 꼽히고 있다.
제갈량의 키는 8척(184 cm)에 풍모가 빼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친형인 제갈근은 말처럼 머리가 길고 못생겼다고 묘사되어 있으므로 이 사실은 신빙성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있다.
제갈량의 용모에 대해 백옥같은 피부에 흰 학창의와 백우선을 가진 모습이 신선과 같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제갈량은 깡마른 체구에 피부는 말라비틀어진 나무껍질 같았으나 눈빛에 힘이 있으며 기품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제갈량의 아내인 황씨는 '황두흑색(노란 머리, 검은 피부)'에 키가 8척(184 cm)이나 되어 여자로서의 매력이 부족하였다고 전해진다.
제갈량의 생애는 크게 형주 시절, 입촉과 유비가 죽기 전, 그리고 유선대에 이르러 남정과 북벌을 할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81년 낭야군의 지방관이었던 제갈규(諸葛珪)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친형은 제갈근(諸葛謹)이고, 친동생은 제갈균(諸葛均)이다. 15세가 되기 전에 양친을 여의어 한동안 백부 제갈현(諸葛玄)이 예장에서 제갈량을 돌봤다. 제갈현이 죽자 형주로 온 제갈량은 스스로 농사를 짓고, 양보음이라는 노래를 즐겨 불렀다. 당시 형주는 난세를 피해 온 명망 높은 선비들이 많았는데, 제갈량은 이들과 교류를 하면서 인맥을 넓히고 지식을 쌓았다.
당시 유비도 여남에서 조조에게 패한 후 유표(劉表)에게 의탁하고 있었는데, 제갈량에 대한 소문을 듣고 삼고의 예를 하여 결국 제갈량을 영입하게 된다. 이때 제갈량이 유비에게 제안을 한 계책이 그 유명한 '천하삼분지계' 이다.
원소(袁紹)를 정벌하고 남하하는 조조에게 맞설 수 없던 유비로서는 남으로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제갈량은 손권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한 사신으로 파견이 되었다. 손권은 제갈량의 요청에 응해 유비와 동맹을 맺었으며, 적벽에서 조조를 격파한다.(적벽대전) 209년 겨울의 일이다.
연의에서와 달리 정사에서는 제갈량이 적벽대전 당시 어떠한 일을 했는지는 나와있지 않으나, 《선주전》에서는 조조를 적벽에서 격파하고 남군까지 추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산양공재기》또한 화용까지 유비가 조조를 추격했다는 기록이 있음을 본다면, 이때 제갈량은 유비의 군사참모로서 활약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반면에 당시 지위가 그다지 높지 않음을 들어 삼국지연의에서와 같은 그러한 활약은 없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후 유비의 형남 4군 정벌에서도 제갈량이 어떠한 일을 했는지에 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나, 군사중랑장이 되어 내정에 힘썼다는 기록을 본다면, 내정에서의 수완은 이미 유비군 내에서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삼국지연의[이하 연의]에서는 방사원(龐士元)이 죽자 군대를 이끌고 참전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정사에서는 유비와 방통이 부수관에서 성도로 향할 때에 형주에서 호응하여 서쪽으로 진군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214년 유장(劉璋)이 항복한 후에는 '군사장군'에 임명이 되는데, 제갈량은 이후 유비가 황제가 되어 승상이 되기 전까지 이 직위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위나라에서 한중 공방전을 치르기 전까지 제갈량의 존재조차 몰랐다는 점 등을 들어 제갈량이 입촉 당시 혹은 유비가 죽기 전까지 중용이 안되었다고 평가를 내리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가후전에서는 이미 조조가 한중을 공략하기 전에 제갈량의 정치가 뛰어났다고 평가했다는 점, 또한 유비가 한중왕이 되기 전까지 좌장군이었지만 황충(黃忠)은 한중전 당시 하후연(夏侯淵)을 전사시켜 좌장군보다 높은 정서장군이 되었다는 점에서, 군사장군이라는 직위도 유비가 임시로 만들긴 했으나 그 권한이 상당했으리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새로운 법률인 촉과를 만드는 등 익주의 구조조정에 노력했다.
유비와 조조의 일생일대의 격전이었던 한중 공방전 역시 연의에서는 신산귀모의 지략을 펼쳐서 조조를 격파한 것으로 묘사가 되어있으나 실제 유비를 수행한 참모는 법정(法正), 황권(黃權)이며 이때 제갈량은 성도에서 유비를 위해 군사물자를 조달했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승자(위/진)의 입장에서 쓰이는 것이니 정사라고 해서 모두 사실로 믿을 수도 없으며, 병참 또한 전쟁에 중요하므로 제갈량이 중용되지 못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유비가 한중왕이 된 후에도 계속 군사장군으로 머물러 있었지만, 황제가 된 후에는 조정의 수장인 승상(丞相)이 된다.
223년 유비가 이릉 대전에서 패하자마자 성에서 놀라 죽을 때 이엄(李嚴)과 함께 탁고를 받는다.
유비(선주)가 죽고 유선(후주)이 황제로 즉위했을 때에도, 그리고 죽기 전까지 줄곧 제갈량은 승상으로 14년간이나 있었다. 당시 익주 남쪽의 호족이었던 옹개(雍闓), 고정(高定), 주포(朱褒) 등이 손권으로부터 암약을 받고 소란을 피우고 있었으므로, 제갈량은 225년 봄에 남정을 개시하여 그 해 가을에 반란을 평정한다.
올돌골이나 목록대왕 등의 일화는 연의의 창작이지만 맹획(孟獲)은 실존인물로 남중 반란은 유언(劉焉)과 유장 부자 때의 중앙 통제에서 벗어난 남부 지역 이민족과 토착 호족들이 반란이며 유비가 한중을 정벌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을 당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엄에게 평정됐고, 유비 사후 손권의 사주로 일어난 반란은 제갈량이 그 유명한 칠종칠금 일화를 남기며 평정하였다. 나중에 또 반란이 일어났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분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지나친 법치주의에 대한 불만이었기 때문에 역시나 금방 평정되었다.
하지만 연의에서 묘사된 것처럼 올돌골의 오과국 군을 지뢰로 격퇴하였다는 것은 허구이며 정사에서는 칠종칠금에 관한 설명을 포함하여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다만 칠종칠금은 남만까지의 여정 등을 고려할 때 사실일 가능성은 거의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227년 제갈량은 유비에게 부탁받은 후사를 실현하려고 위나라를 정벌하려고 군사를 일으켰다. 출진하기에 앞서 올린 상주문은 원문 350자로, 이것이 그 유명한 ‘출사표’이다. 이는 제갈량이 살아 돌아오지 않을 것을 각오하고, 황제에 대한 여러 가지 훈계를 적어넣은 명문이다.
228년 봄 제갈량이 기산을 침공하자 남안과 천수, 안정 3군이 호응하고 강유(姜維)가 제갈량에게 귀순한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마속(馬謖)이 제갈량의 지시에 어긋난 행동을 해 장합(張郃)에게 대패, 마속을 처형하고(읍참마속 또는 휘루참마속)(삼국지연의) 스스로 우장군으로 지위를 낮추면서 승상의 사무를 대행한다. 같은 해 겨울 제갈량은 다시 위나라를 침공해 진창을 포위하지만, 학소(郝昭)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식량이 다 떨어져 귀환했다. 이때 추격해온 왕쌍(王雙)을 물리친다.
229년 제갈량은 또다시 위나라의 영토를 침공해 곽회(郭淮)를 격파하고 무도와 음평을 평정하여 그 공로로 승상에 복직했다.
231년에도 기산을 침공하여 상규에서 사마의와 싸워 대파시킨다. 그러나 식량이 다하여 퇴각했고, 그때 추격한 장합을 목문에서 사살시킨다.
234년 제갈량은 10만 대군을 일일이 통솔해 오장원에 본거지를 구축하고 사마의와 대치했다. 제갈량은 손수레(목우와 유마)를 사용해 식량을 수송하고, 식량 공급이 끊어지지 않도록 병사를 나누어 둔전시킨다. 사마의와 대치한 지 100일이 넘어 그해 8월 병으로 쓰러져 진중에서 54살의 나이에 죽는다. 유언대로 한중의 정군산에 매장되는데, 청렴하고 축재를 하지 않아 집에는 뽕나무 800그루와 척박한 농토 15경만이 있었을 뿐이라고 한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때 제갈량은 자신이 죽을 때를 알고 북두를 향해 기도한 뒤 7일간 등불이 꺼지지 않으면 수명이 12년 연장된다는 의식을 행했지만, 6일째 되는 날 위나라군이 침공한 사실을 알리려고 달려온 위연(魏延)이 등을 밟아 불이 꺼지는 것으로 묘사한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壽)는 제갈량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제갈량은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시대에 맞는 정책을 내고, 마음을 열고, 공정한 정치를 행하였다. 이리하여 영토 안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형벌과 정치는 엄격했는데도 원망하는 자가 없었던 것은 그의 마음가짐이 공평하고 상벌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년 군세를 동원하면서 성공을 거둘 수 없었던 것은, 생각하건대 임기응변의 군략은 그의 장기가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서술했다.
그러나 이것은 《진서》〈진수전〉에 따르면, 진수의 부친이 제갈량으로부터 형벌을 당했고 진수 자신 또한 아들인 제갈첨(諸葛瞻)으로부터 가벼이 여김을 받아서 혹평을 한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진수의 아버지가 진식(陳式)이라는 설 역시, 진식이 한중공방전 당시 마명각도를 끊는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 유비의 동오 수복전 당시 수군을 지휘했다는 점, 제갈량의 3차 북벌 당시 무도 등을 공략했다는 점을 살펴본다면 잘못된 것이다. 진수의 아버지는 누구인지 기록조차 없으며, 마속이 패배했을 당시 곤형(머리를 깎는 형벌)을 당했다는 기록뿐이므로, 일개 부대를 통솔할 정도의 연륜을 가진 무장이 마속의 부장으로 임명되었을 리는 없으며, 또한 패전의 책임을 입은 장수가 3차 북벌 때 군대를 통솔했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법률인 촉과를 제정했다는 점, 그리고 신상필벌이 명확했음에 제갈량은 정치를 철저하게 법가술을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재를 기용할 때에는 덕망이 있는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기용했다는 점에서 유학을 경시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제갈량이 다섯 차례의 북벌을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고 하여 그에게 임기응변의 장략이 부족했다는 평가는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는 반론이 존재한다. 제갈량은 1차 북벌 당시 조운(趙雲)의 군대를 의군으로 하여 위군 장수 조진(曹眞)의 군대를 유인하였고, 3차 북벌도 기습에 가까운 공격이었으며, 4차 북벌에서는 상규에서 사마의의 주력과 싸워서 승리하였다는 점을 살펴본다면, 군사적 재능이 낮다고 평가될 수는 없다. 오히려 제갈량은 위군과 평야에서 전투를 벌여서 승리를 하기를 원했으나 위군의 대 제갈량 전략은 견벽거수(벽을 맞대고 수비만 한다)였음도 제갈량의 군사적 재능이 낮다는 점에 대한 반론이 될 수 있다.
자오곡 계책을 통해 제갈량의 군사적 능력을 깎아내리고 위연의 군사적 재능을 높이는 경우가 있는데, 위연이 청한 군사 5천과 보급병 5천으로는 거성인 장안(長安)을 쉽게 함락시킬 수 없다는 점, 군사적인 재능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지만 조조의 부마인 하후무(夏候楙)가 도주를 안할 수도 있다는 점, 하후무가 도주하더라도 그 휘하에 뛰어난 장수들이 많다는 점 등에서 자오곡 계책은 오히려 실패할 가능성이 많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제갈량의 1차 북벌도 내용면에서는 조운과 등지(鄧芝)로 하여금 의군을 이끌고 조진을 막으면서 제갈량 자신은 기산으로 출병했으므로 자오곡 계책과 별반 다를바가 없다 하겠다.
제갈량의 북벌 의도도 위국을 멸하는 것이 당연한 목표였겠지만, 실제로 우선적인 목표는 옹·양주를 점령하여 국력의 신장을 꾀하고 중원 진출을 수월하게 한다는 평가가 타당하다. 《위서》《진태전》에 그 기록이 나온다.
제갈량이 유비에게 먼저 찾아왔다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제갈량은 그의 출사표에서 삼고의 예를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제갈량을 영입하자 관우(關羽)와 장비(張飛)는 불만을 품었는데, 유비가 그들에게 '(나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수어지교)'이라고 하여 그들의 불만이 없어졌다고 한다.
출사표에서 제갈량이 직접 언급한 뽕나무와 척박한 토지는 제갈량이 청빈했음을 알려주는 일화라기보다는 '그 정도의 땅이 있으니 자손들이 먹고 살기에는 충분했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익주에 있을 때 제방을 쌓았는데 '제갈제'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화정(火井)을 순시하자 그 후 불길이 더 거세졌다는 일화도 있다.
제갈량이 운남 지역을 정벌하고 오는 길에 노수에서 심한 풍랑을 만난다. 맹획이 풍습에 따라 마흔아홉의 사람의 머리로 제사를 지내야 풍랑이 멎는다고 하자 제갈량이 사람 머리 모양의 밀가루로 제사를 지낸 것이 만두의 시초라는 이야기가 있다.
제갈노(諸葛弩)는 열 개의 화살을 연속해서 발사할 수 있는 연발식 연노이다. 제갈량이 발명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출처는 <삼국지연의>뿐으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제갈노는 명나라 때 개량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제갈량에 대한 중국인의 애정표시로 볼 수 있다.
군율에 있어서는 굉장히 냉혹했다. 자신이 그렇게 아끼던 인재이자 자신의 친구인 마량(馬良)의 동생 마속조차도 가정 전투의 책임을 물어 참수시켰을 정도였다. 때문에 아무리 아끼는 인재라도 원칙에 어긋나면 처벌한다는 의미로서 읍참마속이라는 고사가 생겨났다.
원준(袁準)이 제갈량의 북벌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여기에 따르면 제갈량이 평소 군사들의 무장과 무기 상태를 언제나 최고 상태로 유지했고 진채와 병기, 그외 전쟁에서 쓰는 도구도 멋있고 정교하게 꾸몄다고 한다. 촉나라 사람이 경박해 이렇게라도 해야 군대가 유지된다고 원환의 아들은 평했지만 이는 지역감정적인 발언이라 액면 그대로 믿기 힘들고 병사들의 사기를 최고 상태로 유지하고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제갈량의 수완과 배려의 일환으로 봄이 옳다.
이릉 대전당시 촉의 진형을 보고받은 제갈량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 진형을 짠 사람을 참수하고 당장 다시 진형을 짜라고 명령했으나 그 진형을 짠 사람이 유비라는 것을 알게 되자 결국 촉이 패하게 될 것이라 말하면서 크게 한탄했다. 결국 제갈량이 염려했던 대로 이릉대전에서 유비는 육손의 화공에 당해 패배했다.
중국과 한국에서 무속의 신으로 숭배된다. 이때는 '와룡선생'신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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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 20
이름은 인생의 비밀지도/좌우명
이름으로 인생을 경영할 수 있다
이름풀어 보면 인생살이 다 나오니 처세법도 알 수 있다
누구나 이름처럼 산다. 이것을 알고 삶이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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