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수(安商守, 1946년 2월 9일 창원 ~ )는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 출신 법조인,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서울대학교재학 중 학생운동에 투신하여 총학생회 부회장 등을 지냈고, 1974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로 임용되어 20년간 검사로 근무했다. 검사 사퇴 후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다 1996년 김영삼에 의해 발탁되어 신한국당 공천으로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4선을 연임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조사한 담당검사이기도 하다. 한나라당 대표와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지역구는경기도 의왕시와 과천시이다.
생애 초기[편집]
안상수는 1946년 2월 9일 경상남도 마산에서 기와 공장을 하던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1952년 6·25 전쟁이 휴전된 후 아버지가 전염병으로 사망하면서 회사는 사기꾼들에게 넘어가고 어려운 유년생활을 보냈다. 마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한때 풍한방직[1]에서 노동자로 근무하기도 했다.
검사 재직 시절[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입니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뒤 1974년에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로 임용되었다. 검사에 임용되었으나 학생운동, 노동운동 연루 경력으로 검사발령이 되지 않다가 전주지방검찰청에 발령되었고 그곳에서 검사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전주지방검찰청 검사, 대구지방검찰청 검사, 마산지방검찰청 검사,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춘천지방검찰청 검사를 거쳐 다시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로 발령되었다. 서울지검 검사로 재직하던 1987년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진상규명 수사를 맡아 당시 치안감의 은폐음모를 언론에 공개한 뒤 사표를 제출하고 노동운동에 투신, 노동자 법률상담에 종사했다. 경찰 고문으로 숨진 박군의 부검 현장에 입회해, 경찰이 은폐하려던 고문치사를 밝혀내는 데 ‘한몫’을 한 강직한 검사라는 명성을 얻었다.[2]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 당시부장검사였던 최환은 당시 안상수는 당직검사였을 뿐이고, 부검 등 중요한 결정은 자신의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해 안상수의 업적에 대한 논란은 남아있다.[3][4] 이 사건을 계기로 안상수는 1987년 사직서를 제출하고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제5공화국 당시 당직변호사 제도를 제안하여 신설하는데 기여하였으며, 당직 변호사 제도로 무려 3,000여명을 무료 면담하여 한나라당 사이에서는 '인권의 파수꾼'이라고 불리기도 한다.[5]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 공보이사 겸 대변인을 지내기도 했다.
시민단체 활동[편집]
검사직 사퇴 직후, 경향닷컴 객원논설위원회 위원, 변호사회 회원,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회 위원장, 환경운동연합 지도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했고, 1989년 서경석 등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출범에 참여하였다. 이후 그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입법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고, 한국유권자운동연합 발기인 공동대표로도 활동했다
정치 활동[편집]
1996년 김영삼에게 발탁되어 정계에 입문, 그 해의 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신한국당의 공천으로 과천시·의왕시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며, 이후 4선을 연임하였다. 2007년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지냈고, 2009년 5월 국회 운영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된 뒤 한나라당 원내대표에 재선되었다.
2010년 6월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을 거쳐 7월 당대표 최고의원에 선출됐다.
- 마산고등학교 졸업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입학
- 대학교 2학년 재학 중, 학생운동에 투신
- 대학교 3학년 재학 중,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 1965년 6월 :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6 · 3 항쟁 당시 단식농성에 참가
- 1966년 : 이병철의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 성토대회에 참가, 사카린 밀수사건 성토대회 사회를 보다가 주모자로 유기정학을 받았다.
- 1967년 : 여당의 6 · 8 국회의원 선거 당시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자,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집시법'위반으로 재판에 회부, 시국사건에도 연루되어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 1975년 : 제17회 사법시험 합격, 검사에 임용
- 검사에 임용되었으나 학생운동, 노동운동 연루 경력으로 검사발령이 되지 않다가 전주지방검찰청에 발령되었다.
- 전주, 대구, 마산,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 경향신문 : 객원 논설위원
- 1985년 3월 :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맡아 수사한 후 검사직 사퇴
-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장
- 1994년 : 외국인 이주노동자 법률상담소 소장
- 1996년 : 신한국당의 총재였던 김영삼에 의해 발탁, 4·11 총선거에서 경기도 과천 · 의왕시에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정계 입문
- 2010년 : 한나라당 대표 선출
- 2008년 3월 11일에 국회에서 열린 한나라당 주요당직자회의에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좌파 정권'으로 규정짓고 사회 전반에 걸친 인적/제도적 청산 의지를 천명. 실질적으로 지난 정권에서 임명된 정부기관과 산하단체 인사들의 일괄 사퇴를 요구하였다.
- 2009년 5월 27일에 한나라당 신임 원내대표직에 있을 때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세력이 있어 소요사태가 일어날지 걱정”이라고 말해 야당의 거센 반발을 일으켰다.[6]
- 2009년 7월 24일에 야당의 미디어법 장외투쟁과 관련 “등원거부, 거리투쟁과 농성, 국회법 무시, 폭력행사, 반대를 위한 반대, 이명박 정부 발목잡기에 전력을 쏟고 있는 게 제1 야당의 존재 이유냐 정권 퇴진이니 반정부니 하며 흑색선전[7]으로 사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국가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국민에게 해독을 끼치는 것”이라고 말했다.[8]
- 2010년 3월 17일에 아동 성폭행 문제와 관련 “지난 10년간의 좌파 정권 동안에 엄청나게 편향된 교육이 이루어졌다”면서 “이런 잘못된 교육에 의해서 대한민국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는 많은 세력들이 생겨나고 있고 그야말로 극악무도한 그러한 흉악범죄들, 아동성폭력 범죄들까지 생겨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9] 이에 대해 진보신당 김종철 대변인도 논평을 통해 "성폭행범 문제가 소위 좌파교육 때문이라면 우파 세력이 정권을 잡고 있던 시기에 교육을 받은 유영철(1970년생),강호순(1969년생), 조두순(1952년생) 등이 저지른 연쇄살인, 아동 성폭행 등은 군사정권교육, 우파교육의 산물이냐"며 안상수의 발언에 대한 모순을 지적했다.[10]
명진스님 좌파 발언 논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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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3월 21일에 조계종 총무원이 서울 강남구 삼성동 봉은사를 총무원 직영사찰로 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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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승 조계종 총무원장 취임 직후인 2009년 11월 13일 아침에 프라자호텔 식당에서 자승 총무원장과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 고흥길 한나라당 의원이 만났으며, 이 자리에서 안상수 대표가 ‘현 정권에 저렇게 비판적인 강남 부자 절의 주지를 그냥 놔둬서 쓰겠느냐 말했다. 또 11월 30일 자승 스님의 총무원장 당선 직후에 불광사 회주 지홍 스님과 함께 자승 총무원장을 만난 자리에서도 자승 스님으로부터 안상수 대표가 좌파 주지 운운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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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안상수 원내대표는 3월 22일에 “누가 명진 스님인지 알지도 못하고 그 사람이 좌파인지 우파인지 모른다. 봉은사 주지 스님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무슨 압력을 넣느냐?” “일체 대응하지 않겠다”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명진 스님은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10여 년 전 안상수 원내대표와 석가탄신일마다 식사를 함께 할 정도로 친분이 있었음을 밝히고, “날 모른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반박했다. [12] 모임을 주선하고 같이 동석을 했던 김영국 조계종 불교문화사업단 대외협력위원도 3월 23일에 기자회견을 가지고 “명진 스님의 말은 모두 사실”이라고 확인을 했다.[13] 김영국은 한나라당 부대변인 출신을 맡았던 보수성향의 인물이다.[14] 그 후 한나라당 대표 출마선언을 한 직후 기자회견에서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과 신도님들께 심려를 끼쳐 드린 데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15]
- 2011년 1월 26일, 안상수는 국립현충원에 방문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