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다시보기> 청와대, '학자'라면 학문적으로 말하십시오

통계나 분석도 없이 '견해'를 '조사'로 포장

양정철 홍보기획비서관

대학 시절 민주화 운동으로 옥살이를 할 때의 경험입니다. 일반 수형자들은 옥에 갇혀 사느라 쌓인 스트레스를 하루 한 번 마구 욕을 해대는 것으로 풀더군요. 취침 전 각 방의 재소자들이 창가에 매달려 욕 경연대회를 하는 겁니다. 취침 사이렌과 함께 누군가가 "각 방 욕쟁이 집합!" 하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일제히 창 밖에 대고 목이 쉬어라 소리를 지르며 온갖 욕을 다 쏟아냅니다. 한 5분, 10분 그렇게 하면서 광기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하루를 마감하는 것이죠.

매일매일 신문을 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게 본업인 저는 특정신문들을 보며 가끔씩 그 때 기억이 오버랩됩니다. '이게 기사일까, 욕일까', '아, 광기의 아침'. 회의를 갖는 일이 많습니다. 대통령의 참모이기 때문에 다소 예민하게 느끼는 면도 있겠지요. 하지만 미디어전문기자를 해 본 감각으로, 최대한 중립성을 갖고 봐도 그렇습니다.

21일자 <조선일보> '노무현 정부 4년 평가' 특집을 보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일보>는 이 특집에서 한 학자들의 모임, 그리고 한 여론조사 기관과 공동으로 평가를 시도했습니다. 여론조사, 총론, 정치, 외교, 경제, 남은 1년 전망, 그리고 대통령의 스타일을 차례로 다뤘습니다.

'기사'인지 '칼럼'인지, '여론조사'인지 '조사보고'인지 분간이 안간다

솔직히 어이가 없었습니다. 굳이 기자나 학자 출신이 아니어도 '기사'와 '칼럼', '여론조사'와 '조사보고'의 차이를 모르는 분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해당 특집은 '공동조사'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고 있었지만 분간이 가지 않았습니다. 요새 유행하는 한 방송사 코미디프로그램 <개그콘서트> 버전으로 얘기하면 '같기도'입니다. 보고서 같기도 하고, 기사 같기도 하고, 또 칼럼 같기도 하고,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 인상비평 또는 독후감 같기도 합니다. 대체 정체를 알 수 없습니다.

내용에 대해선 <청와대브리핑>이 추후 한 분야, 한 분야 반박할 예정이니 오늘은 구성과 형식의 완결성을 따져보겠습니다.

첫째, 명색이 '공동조사'라 한다면 기준과 분석의 틀, 조사기법과 비교자료를 뭘 갖고 했는지 학문적 근거가 명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론조사를 제외하면 분석수치나 통계는 찾을 수 없습니다. 누구를 상대로 뭘 어떻게 묻고 어떤 결론을 도출했는지의 과정이 명료치 않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제목으로 등장한 핵심내용은 온통 견해입니다. 좋게 표현해 견해지 '주장'입니다. "시대착오" "무능" "국민무시" "실패" "보디페인팅 행위예술가" "모두에게 무시만 당해" "경제열등생".... 그래도 무게 있는 언론사가 실시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내용이 어이가 없었습니다.

<조선일보> 주장인지, 8명 학자들끼리의 견해인지, 여론조사 결과인지, 아니면 세 그룹이 함께 정리한 결과인지 분명히 밝히지도 않은 채 이런 거창한 표현을 단정적으로 쓸 수 있다면 그 용기가 놀랍습니다. 자기나라 정부의 지난 4년을 그리 과감하게 평가하려면 적어도 조사집단과 조사기법, 분석의 틀 정도는 가지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조선일보의 의견 그대로 옮겼다면 특정학자 모임은 '조선일보의 어용'

만일 여론조사 결과만 갖고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임의의 학자모임을 끌어들여 '공동조사'라는 허울을 씌운 허위과장 상품이 됩니다. 그냥 여론조사 결과라고 말해야지요. 그리고 여론조사를 갖고 4년을 평가하는 경우도 있습니까? 만약 <조선일보> 의견이라면 특정 학자모임은 <조선일보>의 어용이 되는 겁니다. 8명 학자들의 토론의견이라면 '공동조사'도 하지 않고 출시한 원산지 허위표시가 됩니다. 자신들 세 그룹의 결론이라면 '공동조사'를 빙자한 공동 불량상품이 될 것입니다. 객체는 없이 주체인 자기들끼리 의견을 나눈 것이 '조사'는 아니니까요.

둘째, 해당 특집이 내린 결론은 온통 한 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무릇 평가든 조사든 공정해야 신뢰를 얻습니다. 올 오어 나씽(All or Nothing)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특집이 내린 결론은 대부분 나씽입니다. 제대로 된 공동조사를 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좌입니다. 아니면 한 쪽 면만 악의적으로 부각했거나요.

긍정적인 면을 봐 달라고 구차하게 구걸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하지만 국적을 갖고 있는 한 조국에 대한 예의는 지켜야 합니다. 아무 근거도 내세우지 않고 자신의 나라가 지난 4년 동안 주변 4개 우방으로부터 무시당했다는 일방적 주장이 어디 있습니까.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인 이 나라의 경제규모를 도외시한 채, 경제성장률을 OECD 평균도 아니고 세계 평균을 갖고 따지면서 '경제열등생'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지난 4년의 경제성적표는 빛과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림자 부분에 대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만 수출, 주가, 물가 등 기초적인 거시 경제지표는 온통 빼고 외눈박이 평가를 하면 안 됩니다.

'정책과 리더십 포럼', 조선일보 출신 교수 등 객관성과 중립성 의문

셋째, 공동조사를 했다는 이 모임의 객관성과 중립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선일보>는 '정책과 리더십 포럼'이라는 곳이 중견학자들의 모임이라고만 소개했습니다. 그래서 좀 알아봤습니다.

모두 여덟 분의 학자가 지난해 10월에 만든 모임이더군요. 이 모임의 괄목할 만한 학문적 성과가 어떻다느니, 대표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분의 평균 연령이 43.5세라느니 하는 점은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으니 자세히 거론치 않겠습니다.

하지만 학자 두 분은, 이념적 대척점이 뚜렷했던 전시작전권 환수반대 성명에 서명하셨던 분입니다. 그 가운데 한 분은 보수성향이 뚜렷한 단체에 몸 담고 있는 분입니다. 다른 한 분은 <조선일보> 기자 출신입니다. 다른 한 분은 <조선일보> 고정 필자입니다. 그런 경력이 허물이라는 주장을 하려는 게 결코 아닙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경력을 갖고 있는 분들이 작업을 했으니 이런 일방적인 결과가 나오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 십상 아닌가요?

<조선일보>는 지난 4년, 대통령과 참여정부에 대해 저주 아니면 욕만 해댔습니다. 지난 4년치 신문 분석을 바탕으로 제 주장의 논거를 대라면 댈 준비가 돼 있습니다. 이번 특집은 <조선일보>가 선거를 앞두고 내놓은 대단원의 '욕 사전'처럼 보입니다. 뭐 하나 새로운 지적이나 평가는 눈에 띄지 않습니다. 매일 지면에서 지긋지긋하게 보던 내용의 재탕 삼탕입니다.

사안사안에 대해 <조선일보>가 어떤 비방을 일삼든 그 회사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명료한 근거나 객관적 기준도 없이 4년 평가라는 이름으로 학자들을 끌어들여 기사인지 칼럼인지, 사실인지 주장인지 구분도 안 가는 공격을 가한다면 그 실체에 대해 주저함 없이 허상을 파헤쳐 나갈 것입니다.

정치신문 울 안에서 감성과 느낌으로 주장만 일삼는 것이 학자의 태도인가

일부 학자들도 <조선일보> 칼럼에서나 볼 수 있는 주관적 견해와 '조사' '분석'을 참칭한 무분별한 공격을 냉정하게 구분해 주시기 바랍니다. 학자는 학술적으로 접근할 때 의미 있는 이름입니다. 특히 따질 일이 있으면 일부 정치신문의 울타리 안에서 감성과 느낌으로 주장만 일삼지 말고 다른 공론의 장에서 학자적 양심과 소신으로 하나하나의 사안에 대해 정부 당국자와 책임 있게 논쟁해 볼 것을 권고합니다. 상대편의 의견과 반론을 듣는 것은 평가의 ABC 아닐까요.

[이 게시물은 운영자님에 의해 2007-02-22 15:32:18 카빙뉴스에서 복사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