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스타시티에는 한동안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스산한 가을 날씨가 계속 되다가 어제와 오늘, 날씨가 더할 나위 없이 화창하다. 가을의 중간쯤 이렇게 좋은 날씨가 며칠 지속하는 기간을 러시아에서는 '바비에 례따'(бабье лето)라고 부른다. 그대로 번역을 하자면 '여자들의 여름'이라는 뜻인데 어디서 이러한 이름이 유래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아름다움에 제법 걸 맞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가을 하늘은 한국에서도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끔 티끌 하나 없이 파란 가을 하늘을 바라볼 때면 상대적으로 나 자신, 세상의 때가 묻은 것 같아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윤동주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랬었지만, 난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스스로 허물을 바로 볼 줄 알고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끊임없이 노력해가는 사람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지난주에는 무중력 비행 훈련이 있었다. 아침에 날씨가 그리 좋지 않아서 예비 일로 잡아놓은 다음 날로 비행을 연기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기상이 더 이상 나빠지지는 않아서 예정대로 훈련을 진행하기로 했다. 기상조건을 살피고 비행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 지체된 시간 때문에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 늦은 오전 여덟 시에야 버스를 타고, 스타시티에서 차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치칼로프스키'에 위치한 공항으로 이동했다. 숙소 앞으로 마중 나온 버스에는 우리와 함께 비행할 교관들이 미리 타고 있었다.
우리에겐 이미 한 번의 무중력 비행 훈련 경험이 있다. 지난겨울 우주인 선발 당시 최종 후보 8명이 러시아 현지 평가를 받을 때 바로 이곳에 와서 무중력 비행 테스트를 받았었다. 그런데 그날과 오늘,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같은 훈련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참 다른 느낌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우선 낯선 이국땅의 정취가 물씬 묻어나던 이곳이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고, 말이 안 통해서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해야 했던 교관들과는 농담을 주고받는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당시만 해도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던 '우주'라는 꿈이 이제는 꿈이 아닌 현실이 되어 내 앞에 펼쳐져 있다는 사실이 설렘과 긴장감 그리고 책임감이 뒤섞인 오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공항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우선 비행기에 올라 간단한 의료 검진을 받았다. 혈압과 체온 등을 검사하고 비행적합 판정을 받은 후, 우리는 곧바로 교관들의 도움을 받아 낙하산을 착용했다. 무중력 비행 중에는 혹시 발생할지도 모를 비상상황에 대비하여 비행기에 탑승한 모든 사람에게 낙하산이 하나씩 지급된다. 교관 중 한 명이 낙하산 사용법에 관해 설명을 해 주었고, 잠시 후 비행기는 연료를 채우고 이륙했다.
러시아에서 사용하는 무중력 비행기는 '일류신 76'이라는 기종의 비행기를 특수하게 고친 것으로 현존하는 무중력 비행기들 중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비행기는 5,000m에서 9,000m까지 고도를 변화시켜가며 비행기 내부에 무중력 상태를 만들어 내는데 그 방식이 재미있다.
보통 사람들은 무중력 비행기가 높은 고도에서 엔진을 끄고 자유 낙하해서 무중력 상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이와 조금 다르다. 생각과는 달리 무중력 비행기는 기체에 작용하는 공기 마찰력과 항력을 이겨내기 위해 지속적으로 엔진을 가동하면서, 공기의 저항이 없는 이상적인 상황에서 자유 낙하하는 물체가 지나는 궤적을 '흉내' 내는 비행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지상에서 대포를 쏘았을 때 포탄에 작용하는 공기의 저항을 거의 무시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포탄은 아래 방향으로는 등가속도의 자유낙하 운동을, 옆으로는 등속도 운동을 하며 포물선 모양의 궤적을 그리고 날아가는데, 무중력 비행기는 바로 이와 같은 포물선 궤도를 따라 비행하면서 공기저항이 없는 이상적인 상황에서의 자유낙하상태를 모사해 냄으로써 비행기 내부의 사람들에게 무중력 상태를 경험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래서 보통 무중력 비행을 포물선 비행(parabolic flight)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5,000m 상공에서 평행으로 날던 비행기는 기수를 45도 정도 올리고 9,000m까지 고도를 올리며 급상승한다. 이때 비행기 내부의 사람들은 약 2G(중력가속도의 2배) 정도의 가속도를 느끼게 된다. 9,000m에 도달하기 전 비행기는 엔진의 출력을 줄이고 공기의 항력을 상쇄해 줄 만큼의 추진력만으로 포물선 궤도를 따라 비행하기 시작한다.
바로 이 순간을 기점으로 해서 약 25초간 비행기 내부에는 줄이 끊어져 추락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느낄 수 있는 것과 유사한 무중력 상태가 만들어지게 된다. 25초 후 비행기는 아래 방향으로 30도 정도 기울어진 기수를 들어 올려 기체를 수평 상태로 안정화시키는데, 이때도 마찬가지로 아래 방향으로 2G 정도의 가속도가 걸린다. 무중력 비행 도중 2G가 걸린 상황에서 자리에 앉아 있다가 일어서 보면, 갑자기 2배가 된 몸무게를 실감 할 수 있다.
'일류신 76'은 한번 급유에 이와 같은 무중력 상태를 10회 정도 만들어 낼 수 있다. 보통 무중력 적응 훈련은 20회의 무중력 비행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비행기는 10회의 무중력 비행 후 착륙해서 다시 한번 연료를 채우고 나머지 10번의 비행을 마치게 된다.
앞에서 무중력 비행기가 포물선 궤적을 따라 비행을 하면서 무중력 상태를 만들어 낸다고 설명을 했는데, 얼마나 급한 경사의 포물선 궤적을 그리는지에 따라서 지구 중력의 1/6인 달에서 느낄 수 있는 중력을 만들 수도 있고, 지구 중력의 1/3인 화성의 중력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무중력 비행기 내부에는 앞에서 뒤쪽을 바라보고 앉을 수 있는 통제석이 마련되어 있다. 우리를 태운 비행기가 '치칼로프스키' 공항을 이륙하여 십여 분 후 안전하게 무중력 비행을 할 수 있는 공역에 도착하자 통제 교관은 각자의 낙하산을 벗어 미리 정해진 자리에 정렬시키도록 지시했고, 우리는 낙하산을 벗어 놓고 교관들과 함께 수행해야 할 훈련들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비행기가 무중력 비행을 시작하길 기다렸다.
잠시 후, 통제 교관의 경고 메시지와 함께 비행기는 기수를 들어 올려 9,000m까지 급상승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2G의 가속도로 몸이 무거워짐을 느끼며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약 십여 초 후, 교관의 2차 경고 메시지와 함께 어두컴컴하던 비행기 내부가 갑자기 노란색 실내등으로 환하게 밝혀졌다. 몽환적인 노란색 불빛이 켜지는 순간 비행기 내부에는 전혀 다른 세상 - '무중력 세상'이 펼쳐졌다. 마치 '네버랜드'의 피터팬이 된 것처럼 비행기 내부의 사람들이 공중을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무중력 상태에서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가벼워지는 듯하다. 공중에 붕 떠있는 모든 사람의 입가에 천진난만한 미소가 맺혔다.
무중력 세상이 지속하는 25초 동안 각자에게 주어진 훈련을 소화해내려면 급히 서둘러야만 한다. 무중력 상태에서 우주복을 입고 벗기, 무거운 물체를 서로 주고받기, 줄을 잡고 이동하기, 이쪽 벽에서 저쪽 벽으로 날아서 이동하기 등의 훈련을 수행하기 위해서 25초는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그리고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무중력 환경에서 내 몸을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훈련이 반복될수록 몸도 마음도 빠르게 무중력 상태에 적응이 되어갔다.
우리가 무중력 상태에서 훈련을 수행하는 동안 통제 교관은 비행기 내부의 안전 상황을 체크하면서 세 번째 경고 메시지를 통해 잠시 후 무중력 비행이 끝날 것임을 알려 주었다. 혹시라도 이때까지 천장에 매달려 있던 사람들은 바닥으로 서둘러 내려와서 무중력 상태가 끝나는 것에 대비해야 했다. 기수를 아래로 향하고 포물선을 그리며 강하하던 비행기는 잠시 후 서서히 기수를 들어 올려 다시 자세를 평행으로 바로 잡았고 우리는 2G의 가속도 덕분에 바닥에 납작하게 달아 붙었다.
이렇게 2G-0G(무중력)-2G 상태를 스무 번이나 반복해서 비행하다 보면 약간 속이 불편해 질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멀미를 하기도 한다. 그래서 미국의 무중력 비행기에는 'Vomit Comet'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기도 하다.
모든 훈련 비행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니 어느덧 늦은 오후가 되어 있었다. 침대에 몸을 눕혔는데 아직 몸에 무중력 상태의 여운이 남아 있는지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날 하루 종일 우리가 '만류 인력의 법칙'을 거스르려고 부단히 노력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결국 어느 한순간도 지구의 인력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지구의 이끌림에서 벗어났다고 착각한 순간에도 사실 끊임없이 추락하는 중이었으니까. 혹시, 그게 억울하다면 하루 종일 나를 향해 추락했던 지구와 처지를 바꿔 생각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07.09.23
2007.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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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빙메이커투 : 이수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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