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신흥중,고교 정문
#변혁운동으로서 교육교육은 인간과 사회를 변혁시키는 가장 합리적이며 체계적인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단순히 사회 구성원과 그들이 갖추어야 할 역량을 제공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교육에 내재된 운동성은 본질적으로 바람직한 미래를 향한 변혁 지향이다.
그래서 전쟁 통에도 학교를 열어야 했고, 교육은 이어져야 했다. 위기에 처한 사회 공동체, 국가나 민족을 구원하는 힘이 교육에서 나왔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는 특히 그러하였다. 근현대 역사서 몇 장을 들춰 보면 주변 민족의 침탈에 대항하였고, 독재 정권의
바다이야기릴게임연타 억압과 민주주의 말살 시도에 저항하기도 하였다. 그런 역사 이야기가 끊임없이 엮여서 나온다.
교육이 체계적이고 의도된 행위라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유년필독(幼年必讀)』이라는 책을 소개할 참이다. 서예가이자 역사가였던 현채(玄采, 1856∼1925)의 저술로, 1907년 5월 출간되었다. 휘문의숙에서 출간한 소학교 학생용 교과서이다.
릴게임꽁머니 1904년 민영휘(閔泳徽)는 휘문의숙에 앞서 자신의 집에 광성의숙이라는 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명성황후와는 꽤 먼 15촌의 혈연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아주 가까운 척족이었다. 권력형 축재자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가 틀림없는 그는 2년 후 관상감 옛터에 학교를 신설하면서 고종으로부터 자신의 이름 '휘(徽)' 자를 딴 '휘문(徽文)'이라는 교
바다이야기합법 명을 하사받았다.
하여 휘문의숙은 비록 사립이지만 고종의 의지가 반영되었기에 교육시설이 매우 잘 갖추어져 있었다. 서양식 신축 건물에다가 도서 편집부와 휘문관(徽文館)이라는 인쇄소는 물론 이화학 실험 도구와 도서관 등도 갖추고 있었다. 일종의 귀족학교였다. 따라서 『유년필독』이 비록 민간에서 간행한 것이지만 당시 최초
오션파라다이스릴게임 로 학부(현 교육부)의 교과서 검정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초의 검인정 교과서 현채의 '유년필독'
# 교과서의 힘『유년필독』은 모두 2책, 총 132개 단원, 국한문
릴게임바다이야기 체로 기술되었다. 국한문 혼용이었지만 한자에는 한글로 토를 달거나 단원별로 해당 삽화를 실어서 아동들이 본문과 비교하며 흥미롭게 학습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구성이나 편집이 현재의 교과서에 견줄 정도였으며, 교사들을 위한 해설서인 『유년필독석의』까지 편찬하였으니 우리 교육사에서 마땅히 선구적이라 하겠으며 내용과 형식에서도 교과서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책의 내용은 한국사, 세계사, 지리, 위인, 정치 등이었다. 특히 을지문덕, 양만춘, 김유신, 장보고, 강감찬, 이순신 등 국난을 극복한 위인들의 행적, 그리고 '독립가', '혈죽가' 등 학생들의 애국심과 독립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발간 부수는 대략 2만 부, 압수된 수량만도 2,154부, 이 교과서의 발매 부수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로 인한 교육적 파장은 폭발적이었다. 요즘 표현으로 하자면 단연 베스트셀러였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일제에게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통감부를 통해 한국인들의 민족의식과 반일 감정의 확산을 차단하려 하였다.
1908년 '교과용 도서 검정 규정'과 1909년 '출판법'을 제정하여 교과서나 저작물의 규제에 나섰다. 『유년필독』과 『유년필독석의』 역시 금서로 지정되어 출판 및 발매가 금지되었다. 일제가 가장 많이 압수한 서적으로서 최초의 금서였지 않나 싶다. 잘 준비된 교육은 무너지는 사회를 일으키는 촉진이 되며, 때로는 체제를 뒤흔드는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라고 본다.
신흥학교 정문 곁에 세워진 '전주 3.1운동기념비'
#3.1운동과 신흥학교
전주의 3.1운동은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민족 대표의 독립 선언에 이어 전국의 주요 도시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학생과 도시의 노동자 혹은 상인층에 의해 주도되었던, 흔히 말하는 제2단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3월 4일과 5일 군산에서 독립 시위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주에 전해졌다. 박태련, 김신극 등 전주의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천도교, 기독교 그리고 신흥학교 등 각계 대표들이 3월 13일 장날을 맞아 시위할 것을 결의하였다. 신간회 총무 박태련을 중심으로 태극기를 만들고 시위용 유인물을 제작하였다.
첩보를 접한 전주의 일제 경찰들은 신흥학교와 기전학교를 비롯한 각급학교에 강제 방학 조치를 하였다. 이에 '더벅머리 총각' 최종삼은 신흥학교 학생 5명과 숙식을 같이 하면서 신흥학교 지하실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당시 외국인이 운영한 선교학교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상황이었다.
13일은 장날이었다. 채소 가마니에 싸서 남문밖 시장(남밖장, 현 남부시장)에 나온 태극기가 군중들에게 배포되었다. 정오가 갓 지난 12시 20분경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남녀 학생 및 천도도 교인 등 15명이 종이에 인쇄한 태극기를 흔들며 시장을 출발하여 제2보통학교(현 완산초교) 인근까지 격문을 뿌리며 만세 행진을 시작하였다.
이어 재판소까지 가는 도중 시위대는 수천 명으로 늘어났다.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시위대와 충돌하면서 체포와 연행이 이루어졌다. 이날 시위는 야간 11시까지 4~5차례 진행되었는데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천도교인들의 수가 약 2백여 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사건을 전한 기사에는 "시위 군중이 왕성한 기세로 조수(潮水)와 같이 각 가로(거리)로 밀려다녔다(매일신보 1919. 3. 17.)"는 것이다. 다수의 경관, 소방조는 물론 기마헌병까지 출동하였다니 이날 시위의 규모와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이날 시위에서는 약 20여명이 검거되었다.
시위는 이튿날인 14일 오후 3시 무렵까지 이어졌다. 14일 시위에는 1천여 명이 참여하였으며 이틀 동안 40여 명이 검거되었다. 검거 과정에서 소방대의 갈쿠리에 찍혀 죽는 사람, 헌병의 폭행으로 죽은 여학생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시위에 가담했다가 구속되어 재판을 받은 학생 중 기전학교 학생 13명은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의 판결을 받았다. 반명 신흥학교 학생 6명 중 대부분은 1년의 실형이 선고되었다. 고형진, 남궁현, 김점쇠, 김경신이 그들이다. 이 중 김경신은 고문으로 전주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나머지도 출감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1920년대 신흥학교에서 다가교를 지나 서문교회 예배하러 가는 학생 행렬. 전주 서문교회 제공
#전주 학생 항일운동1929년 11월의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전남 각 지역에 이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전주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시위 움직임이 있었다. 전주고보와 전주여고보는 사전 발각으로 좌절되고 말았고, 기전학교 학생들은 교내 시위를 하던 중 붙잡히고 말았다.
반면 신흥학교에서는 보다 비밀리에 운동이 조직되고 있었다. 교우회(학생회) 문예부장 박문수(개명 박철웅, 전 조선대 총장), 운동부장 이재영(개명 이철), 서무부 사교계 함수만, 서무부 기록계 원용덕 등이 주도하였다. 거사일을 12월 2일에 이어 12월 12일로 계획하였으나 각각 개교기념일 행사와 학교 당국의 조기 방학 조치로 인해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1930년 1월 25일은 방학을 마치고 다시 개학하는 날이었다. 20일 개학 예정이었지만 학생들이 '교내에서 일대 소동'을 일으켜 22일부터 3일간 다시 임시 휴학이 선언된 상태였다. 기숙사에 남은 교우회 간부들을 중심으로 개학에 맞춰 다시 거사를 준비했다. 외부 연락을 비롯한 거사의 모든 책임은 박문수가 맡았다. 내부 문제는 함수만이 맡았다.
경찰에 잡혀서도 발설 금지 등 절대 비밀 보장, 모든 준비는 기숙사 내에서, 거사일은 25일, 가급적 기전 등 인근 학교와 연계할 것 등 지침이 정해졌다.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경찰은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주변을 24시간 엄중히 경계했다. 초소를 설치하고 인근 천변에 모닥불을 피우면서까지 상황에 대비했다. 이에 학생들은 기숙사 불빛이 밖으로 새지 않도록 차단하며 그리거나 쓰면서 태극기와 전단 등을 제작하였다.
1930년 1월 25일 아침 8시 30분, 간부들은 기숙사생들을 모두 소집하였다. 태극기와 전단을 나누어 들고 다가교(신흥학교에서 전주천을 건너 서문교회에 이르는 일명 신앙의 다리) 쪽으로 나가 등교하는 학생들을 결집하였다. 9시 30분, 80여 명의 학생들이 모이자 결의문을 낭독하고 전단을 살포하였다. "자주독립 만세!, 학생 만세! 동감(同感, 광주 학생 항일운동 지지) 만세!"를 외치며 다가교를 건너 시내로 진출하였다. 전주학생항일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1937년 9월 신사 불참배 문제로 자진 폐교한 후 고창고보로 떠나는 학생 차량. 신흥고등학교 제공
중앙동으로 진출하자 경찰들이 막아서며 닥치는 대로 학생들을 연행하였다. 80여 명 중 연행된 학생 수는 35명이었다. 교사들이 경찰서에 연행된 학생들을 위해 "침구 10여 벌을 준비하여 차입하려 했으나 형무소로 이감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학부모들이 감읍(중외일보 1월 29일)"하였다는 기사도 있다. "경찰에 연행된 35명은 전주서에서 즉결 처분을 받았는데 최고 29일, 최하 15일의 구류 처분을 받았다. 23명은 2월 9일에, 나머지 12명 중 9명은 2월 15일에 그리고 마지막 3명은 24일에 출감(매일신보 2월 22일)"하였다.
하지만 조사와 구류 처분을 받는 동안 추위와 위생 문제 등 처우가 참혹하였다. 주동자 함수만은 출감 후 예수병원에 입원하였으나 그 외상 후유증을 견디지 못하고 5월 19일 분신 사망하고 말았다. 교사들도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검속의 대상이 되었다. 교사 이용희는 2월 23일 밤 9시 무렵 예배당에서 체포되고 가택 수색과 서류 압류(매일신보 2월 27일)를 당했다.
#신사 불참배1937년 7월 7일 만주를 중심으로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일제는 매월 6일(일본 국왕이 중일전쟁 칙서에 서명한 날)을 '애국일'로 정해서 전국의 학교에서 신사 참배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조선총독부 관할 모든 학교의 교원과 학생이 일본군의 승리를 위해 기원하도록 한 것이다.
9월 4일 전라북도 지사가 학교장을 소집하여 애국일 행사를 참여하도록 강요하였다. 하지만 신흥학교를 비롯한 선교학교 교장들은 선교회의 지침에 따라 참석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교원이나 학생들이 참배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방침도 정했다.
이러한 방침에 아랑곳 없이 9월 6일 아침 일본 경찰은 신흥학교, 기전학교 학생들을 집합시켜 다가공원 신사(현 충혼탑 자리)로 강제 인솔하였다. 그러나 신사 앞에 선 학생들은 신사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였다. 경찰이 다그치고 강요하자 신흥학교 학생들은 그 자리에서 흩어지거나 퇴장하였고, 기전학교 학생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울어버렸다. 전주의 첫 애국일, 신사 참배는 총독부 소속 관리와 경찰들만의 행사로 그치고 말았다.
일제는 신사 참배 거부 학교에 대해 폐교 협박을 하는 한편 고강도로 참여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신흥학교에서는 자진 폐교 청원을 내고 스스로 문을 닫았다. 호남의 선교학교 중 광주 숭일, 수피아, 목포 영흥, 정명학교 등은 폐교 조치를 당했고, 순천 매산, 전주 신흥, 기전은 폐교 청원을 제출하며 스스로 문을 닫은 것이다. 1937년 9월 22일 일이었다. 결국 신흥학교 학생 246명 중 197명은 고창고보로 전학했고, 나머지 49명은 학업을 포기하였다. 전학에 필요한 학비 150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5.27 신흥민주화운동 당시 학생들이 어깨를 걸고 교내 시위하는 장면.신흥고등학교 제공
#광주의 절규, 전주에 전해지다1980년 5월, 당시 광주에 머물렀지만 광주민주화운동은 광주·전남지역에 한정된 것으로만 알았다. 전주 신흥학교를 알기 전까지는 그랬다.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전군 지휘관 회의를 개최하여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 논의를 하였고, 곧이어 이 안건은 군인을 동원한 협박 속에서 개최된 국무회의를 통과하였다. 서울의 봄은 짧게 끝나고 말았다. 18일 새벽부터 광주에 무장한 계엄군이 진입하였고, 우리가 익히 아는 무차별 학살과 만행이 시작되었다.
이 소식은 곧장 전주까지 전해졌다. 5월 20일 전주시 다가동 성광교회에 전주 시내 남녀 고등학교 대표 10여 명이 모였다. 이들은 모든 학교 학생들이 전북도청에 모여 광주 학살 만행에 대한 연대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이어 24일 밤 9시경 신흥고 3학년 박영화, 허천일, 김인수, 2학년 허민, 전북대사대부고 유창훈 등이 신상교회에 다시 모여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전두환 살육 작전>이라는 유인물을 작성하며 시위를 계획하였다. 5월 25일, 일요일이었던 이날 오전 9시 덕진공원에는 한일신학교 김명희, 신흥고 박영화, 기전여고, 성심여고, 완산여상 등 학생 대표들이 마지막으로 만나 시위를 최종 점검하였다.
27일 오전 9시 학교별 시위를 거쳐 최종 집결지를 오전 10시 '미원탑'으로 하였다. 미원탑은 정읍 출신 고 임대홍 미원그룹(현 대상그룹) 회장이 옛 팔달로 전주시청 사거리의 신호등 위에 광고를 목적으로 세운 탑이었다.
거사 하루 전인 26일 신흥고 학생들의 점검회의가 있었다. 다가동 장외과 2층 웅변학원에 학생회 간부, 학급 반장 등 20여 명이 모였다. 박영화가 시위를 전반적으로 지휘하기로 했다. 교내 방송실 점거는 허천일과 허민이 맡고 1,2학년 학생 동원 등 역할을 나누었다. 1교시 학급 예배 후 시작종 신호에 맞추어 운동장으로 나가 집결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사전에 전달받기로 약속된 유인물이 경찰에 적발되는 바람에 박영화, 허천일, 김인수 등이 팔복동 신상교회에 다시 모여 <호소문>, 시위용 펼침막, 팻말 등을 급히 제작하였다. <호소문>은 허천일이 작성하였다. 시위 모의에 참가한 일부 학생들은 밤늦게 부모님을 생각하며 유서 일기를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신흥민주화운동을 기념하여 건립한 오이칠정과 기념비(2012년 81회 동기생)
#5·27 신흥민주화운동허천일이 참여자의 의지를 모아 등사지에 철필로 쓴 5.27 시위 참여 <호소문>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다.
"학우여! 민족과 조국 앞에 또한 한민족의 역사 앞에 죄를 짓는 인간이 되고 싶은가! 역사가 증언하고 하늘이 보지 않는가! 아아, 광주 학우의 피의 외침이 들린다. 학우여, 나가자! 나가서 우리의 피, 피를 쏟자! 승리의 피로써 민족의 정통성을 지켜나가자!"
<호소문>에 나타난 당시 학생들의 결기는 뜨거웠다. 민족과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광주 학우들을 위해 피를 쏟자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하는 이들의 심정이 이러했을 것이다. 취재를 하면서 고교생들의 가슴에서 민족교육의 정통, 신흥교육의 전통이 숨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현장감을 드러내기 위해, 5월 27일 당일 상황을 일지 형태로 재구성해 보겠다.
5월 27일 아침 학급 예배가 끝난 9시 무렵 3학년 방송수업이 시작되려는 순간, 미리 준비하고 있던 학생들이 방송실을 장악했다. 방송수업을 대체하여 <호소문>을 낭독하기 위해서였다. 3학년 문과반 학생들의 지침과 안내에 따라 전교생 1,500여 명이 운동장으로 뛰쳐나왔다. 교내 방송을 통해 <호소문>이 낭독되기 시작하였다.
어느새 신흥학교는 4중 포위망에 갇히고 말았다. 착검 무장한 계엄군인, 진압봉을 든 진압경찰, 운동장 상공의 헬기, 운동장 학생들을 향한 페퍼포그 차량(깨스차) 2대 그리고 이 상황을 통제, 지휘하고 있던 다가산 정상의 35사단 계엄군 사령부와 경찰 지휘부.
학교를 탈출하여 시내 미원탑 진출을 시도하던 학생들은 정문에서 막혔다. 이에 펼침막과 팻말을 들고 어깨를 걸고 운동장을 돌며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전두환은 물러가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유신잔당 물러가라! 독재 타도, 민주 수호!" 계엄군경은 안내 방송을 통해 학교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교사들은 해산을 권유했고 학생들은 탈진했다. 이에 학생들은 강당에 모여 예배와 통성기도, 시위의 명분과 목적, 의미 등을 공유하는 시국 공청회를 개최하며 강당 시위를 이어갔다.
신흥고는 다음날 28일부터 6월 1일까지 즉시 휴업 조치를 하였다. 시위를 주도한 25명의 학생들은 휴학과 무기정학 징계를 받았으며, 분개한 최용식, 문봉길 교사는 교직을 사퇴했다. 시위를 주도한 핵심 인물 중 퇴학에 해당하는 지도휴학을 받은 박영화는 학교를 그만 떠나고 말았다. 허천일은 전주경찰서에 연행 후 무차별 폭행을 당하는 등 1주일 넘게 구금 상태에서 조사를 받고 2학기에 겨우 복학할 수 있었다.
이후로도 학생들의 저항은 이어졌다. 3학년 이강희와 이우봉 등은 매일 밤 시내를 돌며 "비상계엄 철폐! 전두환 퇴진!"와 같은 낙서 투쟁, "고등학생이여 총궐기하자!"는 유인물 배포 활동을 한 달 내내 이어갔다. 이 때문에 체포, 고문과 함께 각각 12개월, 10개월의 감옥살이를 하였고 모두 퇴학을 당했다. 종합적으로 28명의 학생들이 징계와 구속을 당했으며 2명의 교사가 사퇴하였다.
'미원탑 집결'은 미완의 항쟁이 되고 말았다. 전주 시민들에게 지역의 명소이자 만남의 광장이었던 미원탑, 광주 금남로에 5.18 광장이 있다면, 전주 팔달로에는 미원탑 광장이 있다. 5.27 전주항쟁의 유적지, 기억 속의 랜드마크가 재탄생하여 문화광장으로 되살아나기를 바란다.
# 다시 교육을 생각함신흥이 배출한 인물들을 일일이 거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광주 출신으로서 중국의 3대 인민음악가로 칭송받고 있는 정율성(1914~1976)을 기리고자 한다. 본명은 정부은(鄭富恩)이었는데, 1929년 신흥학교 34회로 입학하였지만 1933년 졸업을 앞두고 중퇴하였다. 상하이로 이주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본격 음악 공부를 하면서 '율성(律成)'으로 개명하였다. '선율로 성공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이름이다.
전남 신안 자은도 출신으로 신흥학교 36회, 세계적 민중신학의 선구자로서 지난 1970~80년대 군부독재에 항거하였던 서남동(徐南同, 1918~1984) 목사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신흥학교 100주년 기념관이 '서남동홀'이다.
민족의 위기 또는 사회적 절망 상태에서 신흥교육이 역할이 어떠하였는지를 살폈다. 이처럼 곧은 민족·민주·인간교육, 신흥교육이 원형은 무엇일까. 다시 교육의 사명을 떠올려 본다. 함께 어울려 공공의 가치를 터득하는 학교라는 제도를 생각해 본다. 개인의 잠재력과 탁월성을 드러나게 하는 교육은 매우 절실하다. 공동의 가치 실현,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는 실천적 태도를 내재화하는 것은 더욱 필요하다. 그리하여 개인의 탁월성이 공적 가치 실현과 닿아 있을 때, 비로소 교육은 참교육이 되리라 믿는다.
선명완 담쟁이대안교육연구소장
선명완 소장 기자 admin@gamemong.in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