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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의 독립운동가 이위종(李瑋鍾) 선생(1887∼미상)
  글쓴이 : 강희숙     날짜 : 07-05-31 05:34    
 

 



국제협회에서 연설할 당시의 이위종 선생


 

독립기념관(관장 김삼웅)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1907년 헤이그 특사로 활동한 이위종(李瑋鍾) 선생을 2007년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그 공적을 기리는 전시회를 다음과 같이 개최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헤이그 특사 100주년을 기념하여 네덜란드 이준열사기념관에서 협조 받은 실물자료 등 유물8점이 특별 전시된다.


- 기간: 2007. 6. 1.∼6. 30.

- 장소: 근대민족운동관 내

- 내용: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요청하는 헤이그 특사의 호소문 등 실물자료 등 다수


1887년 태어난 이위종 선생은 1896년 주차미국특명전권공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서 3년 반 동안 생활하는 등 어릴적부터 외교관으로서의 자질을 키웠고 선생의 형 이기종(李璣鍾)도 대한제국의 외교관을 지내는 등 선생의 가족은 대한제국의 외교관으로 활약하였다.



《평화회의보》편집장 스테드와 이위종 선생의 특별인터뷰 기사(《평화회의보Courrier de la Conference》1907. 7. 5일자)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자 고종황제는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널리 알리고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자 1907년 6월부터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선생과 이상설(李相卨), 이준(李儁)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일행과 합류한 선생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하며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할 문서 등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 6월 25일 네덜란드 헤이그 역에 도착한 일행은 평화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 특사의 방해와 열강들의 무관심으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요청하는 헤이그 특사의 호소문


선생 등 3특사는 을사늑약의 무효를 알리고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성명서(珙告詞)를 프랑스어와 영어로 작성하여 각국의 대표에게 보내고, 신문과 잡지 등을 통해 한국문제에 대한 국제여론을 형성하였다. 특히 1907년 7월 9일 각국 기자단의 국제협회에 초청된 자리에서 선생은 특사를 대표하여 유창한 프랑스어로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일제의 탄압과 한국의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을 널리 알린 선생의 연설은 각국 대표와 언론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헤이그 신문에까지 보도되어 일제에 대한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특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평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7월 14일 부사 이준이 헤이그에서 갑자기 순국하였다. 이에 선생은 헤이그를 떠나 정사 이상설과 함께 프랑스, 미국을 순방하고 1908년 러시아로 돌아왔다.


선생은 그 후 아버지가 제공한 독립운동자금을 가지고 장인과 함께 연해주로 가서 최재형(崔在亨), 안중근(安重根)등과 함께 한인 의병부대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활발한 국내진공작전 등을 전개하였다. 1911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선생의 자세한 행적은 안타깝게도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실정이다. 다만 1914년에 블라지미르 군사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에 훈련을 마치고 러시아 군에 복무한 것으로 보이며, 1919년 8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한 집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널리 주장하며 집회에서 연설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2007.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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